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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 : 시간과 공간의 작곡가 - 모튼 펠드먼의 사망

by plutusmea 2025. 9. 3.

1987년 9월 3일 세상을 떠난 현대 음악의 거장 모턴 펠드먼. 그는 침묵과 여백, 그리고 시간과 공간 자체를 작곡하며 음악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현대 음악의 낯선 풍경

1987년 9월 3일, 뉴욕 악파의 핵심 인물이자 실험적 작곡가 모튼 펠드먼(Morton Feldman)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때 주변에서 “음악의 침묵을 늘어뜨리는 괴짜”로 불렸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의 작품은 20세기 후반 음악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펠드먼은 관습적인 리듬과 선율을 해체하고 극도로 느린 전개와 미세한 음의 변화를 통해 ‘시간’을 예술의 주제로 끌어올린 작곡가였다.

 

존 케이지와의 만남

펠드먼이 뉴욕 음악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 계기는 존 케이지와의 만남이었다.

 

1950년대 초, 필하모닉 홀에서 쇤베르크 제자인 안톤 베베른의 작품을 듣고 감동을 받은 그는 우연히 로비에서 존 케이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의 동료가 되었다. 케이지의 우연성 기법이 ‘음악에 개입하지 않는 작곡가’를 실험했다면, 펠드먼은 ‘음악이 어떻게 시간을 점유하는가’를 탐구했다.

 

두 사람은 뉴욕 악파(New York School)의 중심에서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 추상표현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음악과 미술을 가로지르는 미학적 실험을 펼쳤다.

 

Morton Feldman (Holland Festival 1976, Wikimedia Commons)
Morton Feldman (Holland Festival 1976, Wikimedia Commons)

 

 

회화에서 찾은 음악의 질감

펠드먼은 종종 화가 친구들의 화실에 머물며 작품을 감상했다. 특히 로스코의 캔버스에서 영감을 받아 “색채가 아니라, 그 색이 놓인 시간”을 음악으로 옮기려 했다.

 

그의 대표작 《로스코 채플(Rothko Chapel, 1971)》은 휴스턴의 예배당에 설치된 로스코의 벽화들과 함께 울려 퍼지도록 작곡된 곡이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음악을 ‘듣는다’기보다는 '공간 속에서 서서히 스며드는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끝없는 느림과 긴 호흡

펠드먼의 후기 작품은 길이만으로도 유명하다. 《String Quartet II》(1983)는 연주 시간이 다섯 시간에 달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음악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미세하게 달라지는 화성과 리듬이 마치 바람결처럼 흘러가면서 청자는 점차 시간의 감각을 잃고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 듯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나는 음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쓰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태도는 기존 음악의 긴장과 해소, 클라이맥스라는 전통적 틀을 넘어선 것이었다.

 

침묵과 여백의 미학

펠드먼의 음악은 소음과 침묵의 경계를 끊임없이 탐구했다. 극도로 낮은 음량과 미세한 뉘앙스로 청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방식은 동양적 미학과도 통한다. 그에게는 음이 울리고 사라지는 순간의 잔향까지가 음악이었다.

 

이 때문에 펠드먼의 작품을 접한 청중은 때로는 불편함을, 때로는 깊은 몰입을 경험했다. 음악은 더 이상 배경음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론적 체험이 된 것이다.

 

 

모튼 펠드먼의 유산

미니멀리즘, 앰비언트, 사운드 아트까지 이어진 현대음악의 흐름 속에서 펠드먼의 긴 호흡과 여백의 미학은 새로운 세대의 작곡가와 청중에게 영감을 준다.

 

그의 음악은 화려하지도 귀에 쉽게 익지도 않지만, 듣는 이에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펠드먼은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목소리로 현대 예술을 울리고 있다.

 

Morton Feldman, Rothko Chapel - Les Cris de Paris - Ensemble intercontemporain

https://youtu.be/ks_mZJR-lAQ?si=27gtfYs3bzBJJ5A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