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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 소련의 베토벤 - 쇼스타코비치의 사망

by plutusmea 2025. 7. 28.

'소련의 베토벤'이라 불린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1975년 8월 9일 사망했다. 스탈린 체제의 검열과 억압 속에서도 음악으로 말했던 그의 생애와 유산을 살펴 봅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생애, 혹은 이중 언어의 예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는 1906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975년 8월 9일에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20세기 클래식 음악에서 가장 역설적인 인물 중 하나다. 누구보다도 전통적인 형식을 충실히 따랐고, 누구보다도 전통을 전복하는 표현을 감행했다. 소련의 공식 음악가였으면서 동시에 체제에 저항하는 숨은 비평가였다.

 

그의 삶은 스탈린 체제와 거의 겹친다. 그는 이 굴곡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음악으로 말했고 그것은 누구도 직접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었다. 그가 남긴 수많은 교향곡과 실내악, 영화음악과 가곡은, 직접 말할 수 없던 감정과 사유를 비틀린 멜로디와 음계의 균열 속에 숨겨두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스탈린의 눈치 속에서 태어난 ‘제5교향곡’

1936년, 쇼스타코비치는 대표작 중 하나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으로 인해 스탈린의 미움을 샀다. 소련 공산당이 운영하는 《프라우다》지에는 ‘음악이 아니라 혼란’이라는 제목의 악평이 실렸고 이는 사실상 체제의 경고장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당시 예술가의 숙청은 빈번했고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지우거나 혹은 새로운 방식으로 말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다음으로 내놓은 작품이 바로 《교향곡 제5번》이었다. 이 작품은 외형적으로는 소련식 영웅주의를 찬양하는 듯한 구조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악장에서 터져 나오는 비정상적으로 과장된 승리의 행진은 듣는 이로 하여금 묘한 불안을 자아내게 했다. 한 평론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강제로 웃게 되는 음악이다.” 이 말은 쇼스타코비치가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식, 그의 음악적 아이러니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교향곡 제5번》은 체제의 칭찬을 받았지만, 동시에 지식인들과 음악가들은 그것이 체제에 대한 조롱임을 간파했다. 감정을 억누른 선율, 절규처럼 일그러지는 관현악의 표정은 단순한 찬가가 아니라 복종하는 척하는 자의 비웃음으로 다가왔다. 이처럼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이중 언어(이중 코드)’를 구사했다. 표면에는 순응, 이면에는 저항이 있었다.

 

《현악 8중주》, 죽음과 기억의 음악

1960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동독 드레스덴을 방문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둘러본 그는 깊은 충격을 받았고, 그 직후 단 3일 만에 한 곡을 완성했다. 그것이 바로 《현악 8중주곡》(정식 명칭은 《현악 4중주 제8번 c단조, 작품번호 110》)이다.

 

이 작품은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이름을 상징하는 음형, 즉 독일식 표기로 D-Es-C-H(D-E♭-C-B)의 동기, ‘DSCH’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는 이 음형을 작품 전체에 걸쳐 새겨 넣으며, 자신이 작곡가로서 살아 있음을 음악 속에 각인했다. 이 동기는 《교향곡 제10번》을 비롯한 다른 주요 작품들에도 등장하며, 일종의 ‘음악 속 자서명’으로 기능한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나는 이 곡을 나 자신을 위해 썼다”고 밝혔다. 이는 음악학자 솔로몬 볼코프가 편집한 《Testimony》에 실린 발언으로, 학계에서는 여전히 진위 여부가 논의되고 있지만, 음악의 분위기와 구조는 이 진술과 맞닿아 있다. 강렬한 불협화음과 갑작스러운 정지, 맥없는 반복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그것이 ‘자기 고백’이자 내면의 유서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후 이 곡은 수많은 해석을 낳았다.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한 애도, 체제에 침묵당한 예술가들의 자화상, 혹은 음악 속에 자신을 매장하려는 듯한 무언의 절규. 무엇보다도 그는 이 곡을 누군가를 위한 헌정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그리고 이름 없는 기억들을 위해 썼다. 그런 점에서 《현악 8중주》는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역사와 예술, 개인성과 집단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 선 음악으로 남아 있다.

 

바비 야르의 진실, 말해질 수 없던 죽음

《교향곡 제13번 바비 야르》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인근 바비 야르(Babi Yar) 계곡에서 자행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 교향곡은 예브게니 옙투셴코(Yevgeny Yevtushenko)의 시에 음악을 붙인 것으로, 유대인 대학살을 다룬 시 자체가 이미 체제의 민감한 반응을 유발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을 통해 말한다. 죽음은 잊혀져서는 안 되며 침묵은 가해자 편이라는 것을.

 

그러나 소련 당국은 이 작품을 검열했고, 옙투셴코는 시의 일부를 수정해야 했다. 쇼스타코비치 역시 후속 연주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 교향곡은 ‘말할 수 없던 것’을 음악으로 말한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역사 속에서 지워진 목소리를 그는 음표로 불러냈다.

 

소련이 지우려던 나치의 '바비 야르' 집단학살 

바비 야르(Babi Yar)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외곽의 협곡으로 1941년 9월 나치 독일이  단 이틀 만에 약 33,000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장소다. 이 끔찍한 사건은 홀로코스트의 대표적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소련 체제에서는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나치가 벌인 집단학살임에도 소련은 왜 이 사건을 지우려 했을까?

이유는 간단치 않았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모든 소련 인민의 희생’으로만 통합했기 때문에 소련 체제 하에서 유대인만의 고통을 따로 강조하는 것은 체제의 통합성을 해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194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스탈린 치하의 반유대주의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 학살을 공개적으로 조명하는 일은 정치적 위험이 따랐다.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가 1961년 시 〈바비 야르〉를 발표했을 때, 그는 “바비 야르에는 아무 기념비도 없다”고 썼고, 이는 소련의 역사 서술에 대한 공개적 문제 제기로 받아들여졌다. 쇼스타코비치가 이 시에 곡을 붙여 《교향곡 제13번》을 작곡하자 당국은 이 작품의 가사 수정을 요구하고 공연을 금지 또는 제한하는 등의 검열로 억압했다.

소련 체제 아래에서 바비 야르는 ‘말할 수 없는 기억’의 상징이었다. 기억되지 못한 학살, 기념되지 못한 희생, 말해질 수 없던 진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으로 침묵을 깨고자 했다.

 

아이러니의 이중 코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기쁨의 멜로디 뒤에 깔린 음산한 화성, 영웅적 주제 안에 감춰진 절망의 리듬. 그는 당대의 많은 예술가처럼 검열과 공포 속에 살았다. 그러나 그 어떤 예술가보다도 기묘하게 자신을 보존했고, 자신의 말들을 미래로 밀어 넣었다.

 

그의 작품에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은 미니멀한 주제의 반복, 단조로운 선율을 통한 감정의 누적, 전통적인 형식을 따른 듯 보이지만 핵심에서 방향을 비트는 구조 등이다. 이는 서정성과 급진성이 공존하는 모순된 세계이며, 체제 내부의 사람들에게는 의미심장한 코드로 작동했다.

 

그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언어로 할 수 없는 말을 듣는 것이고, 표현될 수 없는 감정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는 감정을 미학으로 바꾸었고, 미학을 정치적 실천으로 전환시킨 예술가였다.

 

침묵을 강요당했지만,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1975년 8월 9일, 쇼스타코비치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에 가까운 형식으로 거행되었고, 소련 체제는 그를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냉전의 끝자락과 함께 동구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음악도 다시금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체제 순응의 흔적보다 체제에 맞선 은밀한 저항이 더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는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가 단순한 전쟁 선전 음악이 아니라 파시즘과 전체주의 모두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는 경우가 늘어났다. 음악학자 솔로몬 볼코프는 《쇼스타코비치와 기억의 증언》에서 그가 남긴 구술기록을 바탕으로 "쇼스타코비치는 침묵을 강요당했지만,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Esther Abrami - Dmitri Shostakovich: The Gadfly

https://www.youtube.com/watch?v=37rMV3d7bu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