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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 : 예술은 과학이 될 수 있는가 - 에른스트 베른하임의 탄생

by plutusmea 2025. 7. 27.

에른스트 베른하임(Ernst Bernheim, 1850–1942)은 예술사 연구의 과학화를 이끈 역사학자로, 그의 방법론은 오늘날 미술사와 문화연구의 기초를 세웠다. 8월 8일은 그가 탄생한 날이다.

 

예술은 분석의 대상일까?

이 질문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예술 작품을 단지 미적 감동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산물로 읽고, 그 배경과 형식을 분석하며, 역사적 흐름 속에서 위치 지우는 작업은 오늘날 예술사 연구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법의 가장 기초적인 틀을 마련한 이가 바로 독일의 역사학자 에른스트 베른하임이다.

 

역사 연구의 도구화를 이끈 인물

1850년 8월 8일, 독일 그로스뢰어스도로프(Grossröhrsdorf)에서 태어난 베른하임은 역사학이라는 학문에 실증적 방법론을 본격 도입한 선구자였다. 그는 1889년 출간한 《역사 연구 입문(Lehrbuch der historischen Methode)》에서 당시까지 직관적 기술과 인상주의적 서술에 의존하던 역사 연구에 객관적 기준과 분석적 틀을 제시했다. 이 책은 단순한 기술 지침서가 아니라, 오늘날 인문학 전체에 영향을 미친 사료 비판의 교본이었다.

 

그는 사료를 평가할 때 두 가지 비판 방법을 구분했다. 문서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외적 비판과, 문서 내용의 신뢰성을 따지는 내적 비판이다. 예를 들어, 중세 미술작품에 대한 기록이 있을 때, 그것이 진짜로 작성된 연대에 존재했는지를 먼저 검토하고(외적 비판), 그 기록의 내용이 실제 제작된 양식 및 당시의 사회적 맥락과 부합하는지를 살펴야 한다(내적 비판)는 식이다. 이는 오늘날 예술사에서 작품의 진위와 해석을 검증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통용된다.

 

예술사 연구의 ‘과학화’를 이끈 구조

베른하임의 방법론이 예술사 연구에 끼친 영향은 무엇보다도 예술 작품을 분석 가능한 역사적 ‘자료’로 간주하게 만든 전환점에 있다. 이전까지 예술사 연구는 예술가의 전기 중심이거나 양식의 나열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베른하임의 방법론은 예술 작품이 시대의 산물이며,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생산되고 수용된 결과물이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lin)이 예술 양식을 분석할 때 "선형 대 회화적(linear vs. painterly)", "면 대 깊이(plane vs. recession)", "닫힌 형식 대 열린 형식(closed form vs. open form)"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사용하는 데에도 베른하임의 사료 분석 체계가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술작품은 이제 느낌이나 직관의 대상이 아니라, 구조와 맥락을 분석하는 과학적 대상이 된 것이다.

 

에른스트 베른하임
에른스트 베른하임

 

법과 제도의 역사에도 기여했던 베른하임

베른하임은 또한 법사(法史)의 전문가였다. 이는 단순한 법률의 역사적 변천을 다룬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도와 규범이 인간의 삶과 표현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탐구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중세의 성상파괴운동(iconoclasm), 종교개혁 시기의 도상 제한, 근대 이후 검열 제도의 출현, 박물관 제도의 형성 등은 모두 예술이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어떻게 규제되고 보호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베른하임의 방법론은 이러한 문제들을 단순한 문화적 일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제도사와 문화정치학의 맥락 속에서 분석할 수 있는 학문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예술사 연구자들은 그의 틀을 통해 ‘미술관은 어떻게 근대의 신전이 되었는가’, ‘공공 예술은 어떤 정치적 상징을 담는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베른하임의 업적과 유산

에른스트 베른하임은 직접 그림을 그린 것도, 음악을 작곡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예술가가 되기보다는, 예술이 인간의 역사와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사람이었다. 그의 사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미술사, 문예사, 시청각 문화 연구 등 다양한 분야가 폭발적으로 확장되었고, 그 중심에는 ‘사실에 기반한 분석’이라는 베른하임의 원칙이 놓여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을 감상할 때 단순한 ‘좋고 나쁨’을 넘어선 비평의 언어, 그리고 역사적 의미를 함께 읽는다. 베른하임은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든 첫 번째 지도자였으며, 그의 업적은 예술이 단순히 미를 향한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분석과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인문학적 유산을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