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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 빛의 시인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사망

by plutusmea 2025. 7. 25.

 

1941년 8월 7일 서거한 인도의 시인 타고르. 그의 문학, 교육, 예술, 한국과의 인연까지, ‘빛의 시인’이 남긴 유산을 되짚습니다.

 

인도 문학의 별이 지다

1941년 8월 7일, 인도 캘커타 북쪽 조라상코 저택 2층. 인도 근대 문학의 아버지, 벵골의 음유시인, 동양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생을 마감했다. 향년 80세. 그의 마지막은 평온했지만, 그에 이르기까지는 지난한 고통이 있었다. 1937년과 1940년, 두 차례에 걸쳐 혼수상태를 경험한 뒤로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인도는 물론 세계 각지의 애도 속에 그의 시신은 전통 의식에 따라 가족의 손으로 장례를 치른 뒤, 갠지스 강변에서 화장되었다. 그의 죽음은 한 문인의 타계를 넘어, 하나의 시대와 정신이 막을 내린 사건이었다. 타고르는 예술가이자 철학자였고, 실천가이자 교육자였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위한 시인이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휴머니즘의 시인

타고르는 서양 고전주의 문학의 형식을 탈피하여 인도의 현실과 정서를 담아내는 새로운 산문시 형식을 벵골어로 정립했고, 이를 노래로 승화시킨 ‘라빈드라 상기트(Rabindra Sangeet)’는 벵골 지역에서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다. 1913년에는 그의 대표작 《기탄잘리(Gitanjali)》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여 세계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면서 식민지 인도인들에게 큰 자긍심이 되었다.

 

그의 문학에는 철학, 종교, 자연, 사랑, 자유,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시와 음악, 산문과 회화까지 넘나들며 창조했던 그의 작품은 인류 전체를 향한 초월적 언어이자 종교와 국가를 넘는 보편적 휴머니즘의 상징이기도 했다.

 

교육과 사회개혁의 현장, 산티니케탄

타고르의 삶은 창작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교육과 사회개혁을 예술과 동등한 사명으로 여겼다. 1901년, 고향 근처 볼푸르에 세운 작은 학교 ‘산티니케탄(Santiniketan)’은 전통적인 구루쿨 방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이었다. 이후 1921년, 이 학교는 ‘비스바 바라티(Visva-Bharati, 세계 대학교)’로 성장하며 국내외 지식인들이 함께하는 국제적 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타고르는 교육의 목적을 ‘머리와 손과 가슴이 조화롭게 작동하는 인간’을 기르는 데 두었다. 과학과 예술, 직업 교육과 철학 교육이 병행되었으며, 농촌 공동체와의 연계 속에서 실천적 학문을 강조했다. 그는 카스트 제도의 부당함을 비판했고, 인도 사회에 만연한 종교적 배타성과 편견을 경계하며 포용과 공존을 외쳤다.

 

타고르와 한국

1929년, 타고르는 한국을 향한 짧은 영어 시 한 편을 남긴다. 제목은 「동방의 등불(Lamp of the East)」. 이 시에서 그는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너는 등불이었고, 그 빛은 다시 켜지리라”고 예언처럼 노래했다. 일제 강점기라는 고통의 시절, 이 네 줄의 시는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지식인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신문, 교과서, 벽보를 통해 널리 퍼진 이 시는 찬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식민지 조선에 보내는 국제적 연대의 메시지였으며, 이후 이 시는 한-인도 우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21세기에도 두 나라 간 문화 교류의 교두보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남긴 유산과 오늘의 의미

타고르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타고르는 시를 놓지 않았다. 1941년 7월 30일, 수술을 하루 앞둔 밤, 그는 비서에게 자신의 마지막 시를 구술했다. “나의 자루는 이제 비어 있다. 오늘 내가 받은 것은 사랑과 용서뿐이다.” 이 시는 마치 고요한 기도처럼 인류에게 바치는 고별의 노래가 되었다. 죽음을 마주하며 노래한 희망,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는 그 시선은 그가 평생 노래했던 영성(spirituality)과 인간성의 절정이었다.

 

타고르가 작사한 노래 「아마르 쇼나르 방라」는 방글라데시의 국가가 되었고, 「자나 가나 마나」는 인도의 국가로 채택되었다. 두 나라는 지금도 그 노래 속에 깃든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이는 타고르가 시를 통해 민족의 영혼을 노래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정치적 독립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인간의 정신적 해방, 예술의 자율성, 자연과 인간의 화해를 추구한 ‘시적 국제주의자’였다. 과학과 철학, 교육과 예술을 연결하는 통합적 사유는 오늘날 통섭과 연결의 시대에 더욱 빛난다.

 

타고르의 시는 오늘날에도 ‘상처 입은 세계를 치유하는 공감의 언어’로 낭송되고 있으며, 그가 꿈꾼 ‘국경 너머 인간의 연대’는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그의 시를 다시 읽는 이유는 표현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