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이론의 중심에 있었던 철학자 아도르노는 예술과 음악,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었다. 1969년 8월 6일 그의 죽음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되돌아본다.
비판의 사유를 멈추지 않았던 사상가
1969년 8월 6일, 독일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스위스의 휴양지 치르나우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평소 지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여름을 맞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강의와 집필을 병행하고 있었다.
철학과 예술의 접점에서 활동했던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대표하는 비판이론가이자 사회철학자, 그리고 깊이 있는 음악 비평가였다. 그의 사유는 특정 분야에 머물지 않고 철학, 사회학, 미학, 음악이론을 넘나들며 20세기 지성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비평적 이성이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에 대한 물음을 다시 던지게 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란?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er Schule)는 192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설립된 사회연구소(Institut für Sozialforschung)를 중심으로 형성된 비판적 지식인 집단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경제결정론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문화와 언어, 심리학, 철학을 통합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던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이론을 구축하려 했다.
주요 인물로는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에리히 프롬(Erich Fromm),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등이 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 지성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뿐 아니라 문화와 미디어를 통해서도 지배와 억압을 강화한다는 점에 주목했고, 이로부터 해방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사유를 지속했다.
예술과 사회를 연결하는 사유의 궤적
아도르노는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사회이론을 예술 분석에 적용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계급 분석을 단순한 경제적 틀에 한정하지 않고, 문화와 예술을 포함한 전체적인 사회 재현 구조로 확장했다. 특히 ‘문화산업(Kulturindustrie)’ 개념은 대중문화가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며 어떻게 예술의 비판성을 약화시키는지를 분석한 핵심 개념이다.
그는 헐리우드 영화, 라디오 방송, 재즈, 대중가요 등 당대의 문화 현상을 분석하며, 예술이 오락 콘텐츠로 소비되는 방식에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반영하거나 폭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술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기능이 점차 약화된다. 그는 이 문제를 단호하게 지적하면서도, 예술의 해방적 가능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비판이론이란?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은 기존 사회의 구조와 제도를 긍정하거나 단순히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억압적 성격과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비판적으로 드러내고 해체하려는 이론적 입장을 말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의해 본격적으로 체계화된 이 이론은 특히 계몽주의 이성이 지닌 이중성을 분석하며, 기술적 합리성과 도구적 이성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인간 소외를 심화시키는지를 고찰했다. 비판이론은 단순한 이론적 설명을 넘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적 사유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전통이론과 구분된다. 아도르노는 이 이론의 핵심적 계승자이자 재정립자로, 예술과 문화 속에 내재된 모순과 가능성을 끊임없이 비판적 시선으로 분석했다.
음악은 저항의 언어다
아도르노는 음악이 철학과 동등한 수준의 사유 형식이라고 여겼다. 그는 음악을 언어로 보았고, 이 언어가 형식 속에 담긴 사유와 사회를 반영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그의 관심은 고전주의 음악에서 시작되어 후기 낭만주의를 거쳐 현대 음악으로 이어졌다.
특히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무조음악은 아도르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미학적 실험이었다. 그는 쇤베르크가 기존의 조성과 형식을 파괴하며 새로운 음악 언어를 만들어낸 것을 음악 내적 진보의 예로 보았다. 음악이 조화와 쾌적함을 지향하기보다는 불협화음과 파열을 드러낼 때, 사회적 진실을 더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바그너(Richard Wagner), 말러(Gustav Mahler)의 음악을 분석하며, 이들이 시대정신과 역사적 긴장을 어떻게 작품에 반영했는지를 해석했다. 특히 베토벤의 후기 작품에서는 형식의 파편화와 해체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경향을 예술이 스스로의 전통적 형식을 반성하고 해체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았으며, 이것이 당대 사회의 역사적 긴장과 조응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적 책무 사이
아도르노의 미학은 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적 맥락 사이의 긴장을 기반으로 한다. 그는 예술이 외부 현실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사회적 총체성과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예술은 사회적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거나, 그에 대한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지녔던 형식에 대한 집요한 분석과도 연결된다. 아도르노에게 예술 형식은 내용과 별개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의 긴장을 내부에 품고 있는 구조물이자 투쟁의 현장이었다. 그는 형식을 통해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라고 여겼다.
대중의 열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던 아도르노
그가 생의 마지막까지 집필하고 있던 《미학이론(Ästhetische Theorie)》은 예술의 본질과 사회적 기능에 대한 사유를 집약한 작업이었다. 이 책은 그가 사망한 이후인 1970년에 출간되었으며, 예술이 지닌 자율성과 그것의 한계, 미적 경험의 사회적 성격을 총체적으로 탐구했다. 이 작품은 그에게 있어 유언과도 같았다.
1960년대 말 독일 사회는 학생운동과 급진적 정치 운동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고, 아도르노 역시 그 중심에 있었지만 일정한 거리두기를 시도했다. 그는 대중의 열정이 억압 구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가능성을 경계했다. 철학자는 체제에 편입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현실로부터 물러서지도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아도르노가 남긴 유산
오늘날 우리는 아도르노가 ‘문화산업’이라는 개념으로 지적했던 현실보다 훨씬 정교하고 광범위한 문화 자본의 작동 방식을 마주하고 있다. 예술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로 유통되고, 감상은 클릭과 구독, 알고리즘에 의해 조율되는 행위로 바뀌었다. 창작물은 빠르게 소비되고,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 생산된다. 이러한 구조는 예술의 급진성과 실험성이 발현될 수 있는 공간을 일정 부분 제한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의 예술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목소리와 형태로 존재한다.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와 음악이 널리 소비되고, 창작자들은 제도 밖에서도 청중과 직접 연결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예술은 억압의 대상이기보다, 복잡하게 얽힌 시장과 기술 환경 속에서 새롭게 정의되는 존재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아도르노의 사유는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적 의미를 끊임없이 반성하고 질문하게 만드는 사유의 계기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불협화음 속에서 사회의 모순을 읽어냈고, 미학적 형식 안에서 철학을 실천하고자 했다.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왜 우리는 이 장면에서 감동하는가’라는 질문 속에는 여전히 감춰진 권력과 질서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8월 6일,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세상을 떠난 이 날은 예술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감상자 또한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끄는 기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