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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 현해탄의 비극 - 김우진과 윤심덕의 마지막 항해

by plutusmea 2025. 7. 18.

 

현해탄의 비극, 김우진과 윤심덕의 마지막 항해

1921년 8월 2일 새벽,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조선으로 향하던 여객선 요코하마마루(橫濱丸) 호의 갑판 위. 두 명의 젊은 예술가가 실종되었다. 연극운동가이자 문학비평가인 김우진. 조선 최초의 여성 소프라노이자 신여성인 윤심덕. 이들이 현해탄에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사건은 이후 100년이 넘도록 한국 근대 문화사와 대중의 상상력을 관통하는 상징이 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를 “예술적 사랑의 순교”라 표현했고, 일부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낭만주의적 일탈”로 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죽음은 단지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 포장되기엔 너무 복합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이는 사랑과 죽음, 이상과 절망, 예술과 시대의 불화가 응축된 사건으로 해석되고 있다.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한 동반자

김우진은 1897년 전남 고흥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정치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근대 연극운동과 문학 평론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전통적 연희에서 벗어난 ‘신극(新劇)’을 통해 조선 사회를 계몽하려는 이상을 품었다. 하지만 식민지 현실은 그에게 무력함과 방향 상실을 안겨주었고 예술과 실천 사이에서 깊은 피로를 호소했다.

 

윤심덕 역시 1897년에 태어났다. 평양에서 자란 그는 일본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조선 여성 성악가로 서양식 예술 음악을 공부한 선구자였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당시 조선에는 그녀가 설 무대도, 관객도, 후원자도 거의 없었다. 귀국을 앞두고 열렸던 도쿄 유학생 대상의 독창회는 그녀의 첫 무대이자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두 사람은 일본에서 만나 예술과 문학, 현실과 이상을 함께 나눴다. 그들이 사랑했는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적어도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한 동반자’로 여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우진의 유서 - 나는 예술가로서 죽는다

사건 직후 김우진의 유서가 가족을 통해 공개되었다. 그는 유서에서 “나는 예술가로서 죽는다. 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라고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윤심덕에 대해서는 “그녀는 내 뜻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다. 우리의 죽음은 낭만이 아니다. 현실에 대한 가장 고요한 절규다.”라고 남겼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연애 비극이 아니라, 자기 존재와 예술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해답의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김우진은 이미 여러 편의 평론과 시에서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표현”이라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그의 선택은 극단적이지만, 문학과 연극을 삶의 본질로 받아들였던 사람으로서의 최후의 퍼포먼스였는지도 모른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 -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윤심덕은 요코하마마루에 탑승하기 며칠 전, 일본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상업용 레코드를 녹음했다. 그 곡이 바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사의 찬미》다. 이 곡은 러시아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Josif Ivanovich)가 1880년에 작곡한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Waves of the Danube)》의 선율에, 윤심덕이 직접 한국어 가사를 붙여 부른 노래이다.

 

죽음을 앞둔 자의 고요한 체념과 세상에 대한 환멸, 마지막 정리가 담긴 이 노래는 그녀의 사망 이후인 1926년에 일본에서 정식 SP 음반으로 발매되며 대중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 노래는 한국 대중가요의 효시로 여겨질 만큼 상징적인 곡이 되었고, 윤심덕은 죽음을 노래한 최초의 대중가수로 기억되었다.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1897-1921)

 

사건의 낭만화와 왜곡

그들의 죽음은 의도적 낭만화와 왜곡도 함께 불러왔다. 두 사람의 죽음은 당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대중은 이를 이상주의적 사랑의 완성으로 받아들였다. 윤심덕은 “희생당한 신여성”, 김우진은 “예술의 순교자”로 기억되었다.  한편 윤심덕은 때때로 “김우진에게 이끌려 죽었다”는 식의 가부장적 해석이 덧붙여지기도 하는 등 사건의 낭만화와 왜곡이 횡행하기도 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일화는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되새겨지고 있다. 그들의 죽음과 관련해 명확하게 드러난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적어도 이 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한국 근대 예술이 감당해야 했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떠올리게 한다.

 

윤심덕, 사의 찬미(1926)

https://www.youtube.com/watch?v=Mfb4aqQuf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