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8월 12일 : 시대의 균형을 고민한 작가 - 토마스 만의 사망

by plutusmea 2025. 7. 31.

1955년 8월 12일, 독일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이 스위스 취리히에서 향년 80세로 사망했다. 《마의 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요셉과 그 형제들》을 남긴 그는 20세기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소설가이자 사상가였던 토마스 만은 문학을 통해 인간 존재의 내면과 시대의 도덕적 갈등을 깊이 있게 탐색했다. 그는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 예술과 정치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지성의 책임을 모색했던 인물이었다.

 

병든 유럽을 응시한 서사

토마스 만의 문학은 전통적인 사실주의 서사와 구별되는 복합적인 구조를 갖는다. 그는 신화, 철학, 음악, 정신분석 등 다양한 지적 담론을 작품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했다. 대표작 《마의 산》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을 고산 요양소라는 설정 안에서 은유적으로 묘사한 장편소설이다.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는 병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유주의, 전체주의, 허무주의 등의 세계관과 마주하며 점차 의식의 변화를 겪는다.

 

작품 속 ‘질병’은 단지 육체적 증상이 아니라, 문명과 이념의 혼란을 상징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도 늙은 예술가 아셴바흐가 소년 타지오에게 느끼는 매혹은 감정과 도덕의 경계를 묻는 서사로 전개되며 아름다움과 파멸 사이의 복잡한 심리를 조명한다.

 

중산계급의 내면을 해부하다

토마스 만은 1901년, 26세에 발표한 장편소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이 작품으로 192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은 북독일의 상인 가문이 4대에 걸쳐 몰락해 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개인의 예술적 감수성과 사회적 책임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이 작품에서 토마스 만은 독일 부르주아 계층의 자기 정체성과 몰락을 동시에 관찰한다. 그는 중산층의 가치와 교양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윤리성과 문화적 기반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는 토마스 만의 문학이 보수와 비판, 해체와 존중 사이의 균형 위에 서 있었음을 보여준다.

 

Thomas Mann
Thomas Mann

 

망명과 저항, 그리고 지성의 언어

1933년 나치가 집권한 이후, 토마스 만은 독일을 떠나 스위스와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미국에서 1940년부터 BBC를 통해 독일 청취자들에게 전한 라디오 연설(《Deutsche Hörer!》)을 통해 파시즘에 대한 비판을 지속했다. 이 연설은 총 58회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독일은 곧 히틀러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했다.

 

《독일 청취자들에게(Deutsche Hörer!)》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토마스 만은 BBC 런던 방송을 통해 독일 청취자들에게 총 58회의 라디오 연설을 송출했다. 이 연설은 《Deutsche Hörer!》(독일 청취자들이여!)라는 제목 아래 나치 체제에 대한 비판과 독일 국민에게 보내는 도덕적 호소를 담고 있다. 그는 독일어로 직접 대중에게 말함으로써, "히틀러가 독일 그 자체는 아니다"라는 핵심 메시지를 반복했다.

연설은 영국 정보부(Political Warfare Executive)의 지원을 받아 매주 혹은 격주로 방송되었으며, 토마스 만은 망명 작가로서 조국과의 끈을 단절하지 않기 위해 이 작업을 중단 없이 이어갔다. 그는 단순한 정치적 고발을 넘어서, 독일 국민 스스로가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인식하고 새로운 사회를 세워야 한다는 깊은 성찰을 담았다.

이 연설문들은 전후 1945년 한 권의 책으로도 출간되었고, 이후 독일 지성사에서 가장 윤리적인 문장들로 평가받는다.

 

그의 목소리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유럽의 도덕적 무게 중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 내 반공주의 흐름이 거세지자, 토마스 만은 1952년 다시 스위스로 귀국하였다. 정치적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는 평생 양심의 균형을 지키려 했고, 그것은 그가 겪은 이민자적 고립감과 지적 긴장의 근원이 되었다.

 

사유의 유산으로 남은 작가

1955년 여름, 그는 취리히 인근의 병원에서 혈전으로 쓰러졌고, 결국 회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당시 전 세계 주요 언론에 보도되었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문학계에서는 그의 문학적 유산을 기리는 다양한 평가가 이어졌다.

 

토마스 만은 예술과 도덕, 개인과 사회, 병과 문명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의 조건을 해부했다. 그는 질문하는 문학을 남겼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쉽게 닳지 않는 질문이 남았다.

 

예술은 윤리와 욕망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 지성은 시대 앞에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병든 세계에서 치유는 가능할까? 이러한 질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토마스 만은 답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는 질문을 남겼고, 독자들은 그 질문 앞에서 여전히 머문다.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남긴 가장 깊은 흔적이며 토마스 만이 지금도 읽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