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7월 9일 이른 아침, 미국 뉴저지주 리틀 퍼리(Little Ferry)의 한 외곽 지역에 위치한 20세기 폭스(20th Century Fox)의 영화 필름 보관 창고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이 창고는 20세기 폭스가 191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제작한 수많은 무성 영화 필름 릴을 보관하던 핵심적인 자료 저장소였다. 당시 창고 내부에는 수천 개의 필름 릴이 쌓여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지금은 보기 힘든 질산 셀룰로이드(nitrate celluloid)로 만들어져 있었다.
화재는 예고 없이 발생했고, 소방대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창고 전체가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현지 주민들은 수십 미터 높이로 치솟은 화염과 연기를 목격했으며, 연쇄적인 폭발음이 들렸다고 증언했다. 불길은 빠르게 번져나갔고, 창고는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 영화사의 초기 유산을 지탱하던 물리적 토대가 한순간에 사라진 참극이었다.
질산 셀룰로이드 필름의 위험성
이 화재가 치명적이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영화 필름의 주된 재료가 바로 질산 셀룰로이드였다는 점이다. 이 물질은 매우 인화성이 강하고, 공기 중에서뿐만 아니라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도 자체적으로 연소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질산 셀룰로이드는 마치 폭약처럼 다뤄져야 하는 위험 물질이었고, 불이 붙었을 경우 물로도 진압이 불가능했다. 불이 붙은 필름은 마치 마그네슘처럼 타올라 완전히 재로 변할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창고는 적절한 환기 설비나 습도 조절 장치 없이 수많은 필름 릴을 밀폐된 공간에 쌓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이처럼 위험한 물질을 보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준조차 마련되지 않았던 점이 이번 사고를 막지 못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이는 단지 기술적 실패가 아닌, 자료(문화재) 보존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였다.
화재의 전개와 피해 규모
화재는 오전 2시경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최초로 연기를 목격한 인근 주민의 신고로 소방대가 출동했다. 그러나 이미 내부 온도는 섭씨 수백 도에 달하고 있었고, 창고는 수 분 내에 전소되었다. 20세기 폭스사 측은 사건 직후 “창고에 보관 중이던 대부분의 무성 영화 원본이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소실되었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은 이를 단순한 화재 사건이 아니라 “미국 영화 산업 초창기 유산의 전례 없는 손실”이라 보도했다. 영화사 측은 보존되지 않은 원본 필름의 수가 수천 릴에 이르며, 일부는 당시 유일하게 존재하던 복사본이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이 화재는 단순히 물리적 손실이 아닌, 영화라는 예술 형식의 집단적 기억이 한순간에 지워진 비극적 사건이었다.
사라진 영화 유산
이 화재로 인해 우리는 지금까지도 많은 초기 영화를 접할 수 없게 되었다.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더글러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 테드 베리(Ted Barry)와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들, 그리고 당시만 해도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형식으로 시도되었던 많은 무성 영화들은 그 원본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복사본이나 대체본도 존재하지 않던 이들 영화는 이제는 제목만 전해지거나, 포스터와 같은 인쇄물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2013년, 미국 영화 유산 재단(National Film Preservation Foundation)과 영화사학자 데이비드 피어스(David Pierce)는 1912년부터 1929년 사이 제작된 미국 무성영화의 70% 이상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바로 이 화재로 인해 사라졌다는 점은 한 번의 사고가 얼마나 큰 문화적, 역사적 공백을 만들어내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보존' 역사와 제도적 변화
리틀 퍼리 화재는 영화 필름 보존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 의회 도서관(Library of Congress)과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을 비롯한 주요 문화기관들은 질산 필름의 위험성을 공식적으로 경고하고, 보다 안전한 대체 필름인 셀룰로이드 아세테이트(safety film)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게 된다. 1940년대 이후에는 질산 필름 보관을 위한 특별 저장소가 설계되었고, 전용 환기 시스템과 화재 감지 장치를 갖춘 아카이브가 새롭게 구축되었다.
이와 함께 영화 복원의 필요성도 제기되기 시작했고, 영화 예술을 단순 소비재가 아닌 보존해야 할 역사 자산으로 인식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훗날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감독이 창설한 ’필름 파운데이션(The Film Foundation)’은 이러한 영화 보존 운동의 상징적 사례로 자리 잡게 된다.
오늘날의 교훈과 디지털 시대의 보존 의식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수많은 영상물을 쉽게 저장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지만, 1937년 미국에서 발생했던 비극적 화재는 여전히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디지털 파일은 복제와 전송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하드웨어 노후화, 포맷의 급변, 서버 해킹과 같은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더구나 디지털 복제가 가능한 자료라 하더라도, 원본이 지닌 질감과 화질, 편집의 자취, 물리적 세부 사항들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다.
최근에는 AI와 머신러닝을 활용해 필름을 복원하는 기술이 점점 정교해지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일부 조각을 재현할 수 있는 방법일 뿐이다. 원본의 소멸은 그 자체로 예술의 한 시대를 지워버리는 것이며, 이는 단지 영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예술 형식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숙명적 과제다. 예술이 기록으로 남지 못할 때, 우리는 결국 그 존재 자체를 기억할 수 없게 된다.
1937년 7월 9일, 리틀 퍼리의 화재는 한 영화사의 사고를 넘어, 예술 보존과 기억의 윤리에 관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은 “기억을 보관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기억을 어떻게 다시 불러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시대와 감정을 기록하는 매체이며, 그것이 소실되었을 때 남는 것은 공허뿐이다.
우리가 오늘날 즐기고 있는 수많은 영상 예술은 모두 과거의 기록과 보존 위에 세워져 있다. 리틀 퍼리의 화염 속에서 사라진 필름 릴들은 그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증명해 준다. 예술은 영원하지 않으며, 보존되지 않은 예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1937년의 그날은 단지 과거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오늘을 위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