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색채의 시인', 마크 샤갈의 탄생
1) 환상의 붓을 들다: 마크 샤갈의 탄생
1887년 7월 7일,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시적이고 환상적인 화풍을 구축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혀 '색채의 시인'으로 불리는 마르크 자하로비치 샤갈(Marc Zakharovich Chagall)이 벨라루스 비텝스크에서 유대인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비텝스크는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 게토(ghetto, 과거 유대인들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은 거주 지역)로 엄격한 종교 관습과 가족 중심의 공동체 생활이 지배적이었기에 샤갈은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 감수성과 유대 민족의 오랜 전통을 접하며 자랐다. 파리에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은 샤갈은 다양한 예술사조—입체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와 교류하였지만,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소속되지는 않았다. 그는 유럽 모더니즘(modernism)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과 주제를 고집했고, 그 결과 샤갈의 작품은 언제나 ‘샤갈적’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 고유의 세계를 갖게 되었다.
2) 꿈과 현실의 경계 위에서
샤갈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나와 마을》(1911)은 그의 세계관을 명확히 보여준다. 떠오르는 이마를 가진 인간과 초록색 얼굴의 젖소가 교차하는 이 작품은, 동물과 인간, 고향과 도시, 현실과 환상이 하나로 얽혀 있는 장면을 형상화한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단지 외부 세계를 묘사하는 수단이 아니라, 기억과 정체성, 상상과 감정이 교차하는 내면의 풍경을 시각화하는 도구였다. 결혼식 《The Wedding》 (1910), 바이올리니스트 《The Green Violinist》 (1923–24), 회당 《The Synagogue》 (1930), 토라 두루마리 《Torah Scroll》 (연도 미상) 등에서는 색채와 형상으로 새롭게 재해석한 유대인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이처럼 샤갈은 문화적 기원과 개인적 경험을 환상과 시로 가공해 낸 ‘색채의 시인’이었다.
3)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가
샤갈은 회화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연극과 발레 무대미술, 스테인드글라스, 모자이크, 일러스트레이션 등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활동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의 천장화를 맡아 “음악의 찬가”를 그려냈고, 예루살렘 하다사 병원(Hadassah Medical Center)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형상화한 명작으로 남았다. 그의 예술은 전쟁과 망명, 사랑과 상실을 모두 겪은 인간의 고백이자 위로였다. 특히 샤갈은 전쟁으로 인한 실향(失鄕)과 아내 벨라의 죽음을 겪은 뒤에도 삶과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계속 그려나갔다. 이는 단지 이상적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품고 화해하려는 태도이기도 했다.
4) 색채로 쓴 시
마크 샤갈은 1985년, 프랑스 남부에서 97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색채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빛난다. 마치 꿈속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붓놀림, 자유로운 구성, 부유하는 인물들과 환상적인 배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일상과 예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거리를 흐리게 만든다. 그의 작품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말에 가장 적합한 예술이 아닐까. 오늘 7월 7일, 우리는 그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며, 색으로 감정을 그리고, 기억을 환상으로 승화시킨 그만의 시각 언어를 다시금 떠올린다. 샤갈의 세계는 단지 캔버스 위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보는 이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오래도록 반짝이는 ‘정서의 색채’다.
2. Three Tenors 전설의 시작
1) 테너 세 거장의 만남
1990년 7월 7일, 이탈리아 로마의 고대 유적지 카라칼라 욕장(Terme di Caracalla)에서 클래식 음악사에 길이 남을 공연이 시작됐다. 그 이름도 유명한 ‘Three Tenors’—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세 명의 세계적인 테너가 처음으로 한 무대에 올랐다. 이 공연은 원래 카레라스가 백혈병에서 회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자선 무대였으며, 같은 해 열리던 FIFA 월드컵 결승과 맞물리면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지휘자 주빈 메타(Zubin Mehta, 1936~)가 이끄는 로마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이 콘서트는 현장 관객뿐 아니라 생중계를 통해 약 8억 명이 시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야말로 고전 음악의 ‘슈퍼스타’들이 전 세계를 감동하게 한 밤이었다.
2) 클래식을 넘어서 대중으로
이 공연의 가장 큰 의의는 오페라라는 장르가 가진 무게감과 진입장벽을 넘어서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는 데 있다. ‘Nessun Dorma’, ‘La donna è mobile’, ‘Granada’, ‘O sole mio’ 등 오페라 아리아와 이탈리아 민요, 스페인 노래, 뮤지컬 넘버(뮤지컬에서는 노래 제목을 붙이는 것이 무의미하므로 숫자를 붙인다) 등을 넘나들며 고전과 대중의 경계를 허물었다. 특히 파바로티가 부른 ‘Nessun Dorma’는 그의 대표 아리아로 자리매김하며, 스포츠 경기나 광고, 영화에도 사용되며 대중적 상징이 되었다. 세 명의 테너는 각자 뛰어난 기량을 보였지만, 무엇보다 매우 인상적이었던 건 그들 사이의 화합이었다. 경쟁이 아니라 우정과 존중으로 이뤄진 무대는 음악이 단지 기술이 아니라 인간적 연결의 수단임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순수 클래식 레퍼토리와 함께 대중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가미하여, 클래식 음악이 단순히 과거의 음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대중에게도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했다.
3) 지속된 감동과 유산
이날의 공연은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았고 '전설의 시작'이었다. Three Tenors는 이후에도 1994년 로스앤젤레스, 1998년 파리, 2002년 요코하마 등에서 월드컵과 연계한 공연을 이어가며 시리즈처럼 지속적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클래식 앨범 사상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리며 수천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를 기록했고, ‘클래식 음악계의 비틀즈’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세 거장은 각자 활동을 이어가며 세계적인 명성을 유지했지만 2007년 파바로티의 사망으로 전설의 무대는 멈추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hree Tenors는 클래식 음악의 대중적 접근성과 표현 가능성을 넓혔으며, 특히 후배 성악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4) 하나의 무대, 하나의 기억
7월 7일은 클래식 음악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날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그날의 공연은 유튜브를 통해 지금도 쉽게 감상할 수 있으며,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들의 노래에 눈시울을 붉히고 마음을 열곤 한다. 예술은 마음과 마음을 잇는 다리다. 그리고 그 다리 위에서, 세 명의 테너는 하나의 목소리로 우리 모두에게 ‘함께 노래하는 세상’을 들려주었다. 1990년 7월 7일, 우리는 그들이 보여준 음악의 힘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