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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 몸의 예술가 - 브루스 리의 사망

by plutusmea 2025. 7. 9.

 

할리우드를 넘어선 상징의 탄생

1973년 7월 20일, 브루스 리(Bruce Lee, 李小龍)가 홍콩에서 세상을 떠났다. 불과 32세의 나이였다. 사망 원인을 두고 지금까지도 다양한 추측이 오가지만, 그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생애였다. 그는 단순한 액션 배우가 아니었다. 무술가이자 철학자이며, 문화적 아이콘으로서 몸의 언어로 세계와 대화한 예술가였다.

 

브루스 리는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했으며, 18세까지는 홍콩에서 자랐다. 영화배우였던 아버지 덕분에 아역 시절부터 홍콩 영화계에 모습을 드러냈고, 젊은 시절엔 무술 실력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할리우드 진출을 시도했다. 그는 미국에서 《그린 호넷》(The Green Hornet)의 카토(Kato) 역으로 데뷔했지만, 당시 아시아계 배우들이 주연으로 활약하기는 매우 어려운 시대였다.

 

할리우드는 동양인을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소비하는 데 익숙했으며, 오리엔탈리즘의 시선 속에서 브루스 리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극심한 인종 장벽과 기획사들의 편견은 그를 실망시켰고, 결국 그는 홍콩으로 돌아가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산대형》(1971), 《정무문》(1972), 《맹룡과강》(1972)을 통해 아시아 전역과 세계 시장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단순히 동양 무술의 전도사가 아닌, 새로운 문화적 혼종성을 체현한 배우였다.

 

동양에 투사된 서양의 시선, 오리엔탈리즘이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방식, 또는 동양을 재현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일련의 담론과 이미지를 말한다. 이는 단순한 문화적 차이의 표현이 아니라,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이국적’, ‘신비롭고 낯선’, 때로는 ‘야만적’이라는 동양에 대한 고정관념을 포함한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고전 《오리엔탈리즘》(1978)에 따르면, 이러한 시선은 제국주의의 산물로서 동양을 ‘타자화’(othering)하고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했다. 특히 20세기 초 할리우드 영화나 문학에서 동양인은 종종 음험한 악당, 수동적인 희생자, 혹은 무속과 미신의 세계에 갇힌 존재로 묘사되었다. 브루스 리는 바로 이 오리엔탈리즘의 틀을 부수고, 동양인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재현한 최초의 스타 중 하나였다. 그의 존재는 단지 인종의 대표성을 넘어서, 서구의 시선으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서사와 이미지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몸의 예술 : 무술가인가, 예술가인가?

브루스 리는 무술가로서 자질을 타고났지만, 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세계를 창조해 냈다. 전통적인 무술을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많은 유파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체계를 만들었고, 이를 ‘절권도(Jeet Kune Do)’라는 독창적인 철학으로 구체화했다. 절권도는 “형태가 없는 형태”, “고정된 것은 무용하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하며, 싸움 그 자체가 아니라 ‘흐름’과 ‘적응’을 강조한다. 이는 무술이 아니라 철학이며, 철학을 실천하는 행위로서의 예술이었다.

 

그의 무술은 ‘동작의 미학’ 그 자체였다. 촬영용 액션이 아닌 실제의 몸놀림으로, 그는 극장 스크린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듯 싸웠다. 주먹은 붓이 되고, 발차기는 음악이 되어 관객의 감정을 흔들었다. 그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감정을 표현했고, 이는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몸의 시학’이었다. 그는 “물이 되어라(Be water, my friend)”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짧은 말에는 유연함과 변화, 고정되지 않은 창조성이라는 예술의 핵심 가치가 담겨 있다. 무술은 상대를 꺾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자신을 꺾지 않기 위한 철학이 되었고, 이는 모든 예술가가 지녀야 할 태도이기도 했다.

 

죽음 이후의 영향력과 신화화

브루스 리의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홍콩의 아파트에서 동료 여배우와 영화 대본을 검토하던 중 두통을 호소하며 약을 먹었고, 이후 깨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당시 사인은 ‘약물에 대한 과민 반응’으로 알려졌지만, 그를 둘러싼 미스터리는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일부 팬들은 음모론을 주장했고, 미완성으로 남은 영화 《사망유희》(Game of Death)의 설정과 실제 사건이 겹치면서 그의 죽음은 하나의 ‘서사’가 되었다.

 

오히려 그 미스터리 덕분에 그는 살아 있는 전설이자 신화가 되었다. 브루스 리는 죽은 뒤에 더 널리 퍼졌다. 그의 이미지는 영화뿐 아니라 팝아트, 벽화, 광고, 게임, 스트리트 아트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었다. 특히 미국 힙합 문화에서는 동양적 정신성과 몸의 역동성을 동시에 구현한 아이콘으로 각인되었으며, 《킬 빌》(Kill Bill)이나 《매트릭스》(The Matrix) 같은 영화에서도 그의 흔적은 선명히 드러난다. 심지어 그는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시아인’ 중 하나로 꼽히며, 그의 철학과 예술적 태도는 시대를 넘어 새로운 세대에게 계승되고 있다. 그의 얼굴은 티셔츠와 포스터에 새겨지고, 그의 발차기는 유튜브 영상으로 리믹스 되며, 그의 사상은 수많은 글 속에 인용된다.

 

영화 예술의 경계를 확장한 인물

브루스 리는 단순한 액션 장면의 연기를 넘어, 무술과 영화라는 두 영역의 경계를 허문 창조자였다. 과거에는 영화 속 싸움 장면이 ‘현실성’을 지향하기보다는 연극적 효과에 치중되었지만, 그는 실제 무술을 기반으로 한 액션을 통해 리얼리티와 예술성을 동시에 구현했다. 그는 카메라를 배치하고 편집을 지시하며, 자신의 철학을 시청각 매체에 가장 잘 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영화는 예술 영화도, 단순한 상업 액션도 아니었다. 그는 자기 몸을 무대 삼아 세상의 억압과 차별, 정체성의 위기를 표현했고, 그것이 세계적인 공감을 얻었다. 이른바 ‘몸으로 연기하는 배우’, ‘몸으로 말하는 예술가’라는 말은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다. 또한 그는 스턴트와 무술 연기의 미학을 확립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후 수많은 액션 배우가 그의 방식을 모방하거나 계승했고,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슬로모션 액션’, ‘1인칭 시점 격투’, ‘무술 기반의 편집 기법’ 등은 모두 브루스 리가 남긴 유산의 일부다.

 

영화 《당산대형》의 브루스 리(이소룡) 사진
영화 《당산대형》의 브루스 리(이소룡) 사진

 

브루스 리의 존재가 남긴 질문들

브루스 리는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는 과연 ‘동양’을 대표한 배우였을까, 아니면 정체성의 경계를 무너뜨린 전 지구적 예술가였을까? 그의 영화는 단지 통쾌한 액션극이었을까, 아니면 억압과 저항, 자유와 철학을 담은 신체적 언어였을까? 그의 사망일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몸’을 매개로 인간과 예술, 철학과 테크놀로지의 접점을 고민하게 하는 시작점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의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재해석되고 있으며, 그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여전히 그에게 배우고 있다. 기술이 아닌, 철학으로. 몸이 아닌, 정신으로. 무엇보다 예술을 통해 말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당산대형 唐山大兄》 李小龍 Bruce Lee 1971 (자막 설정 가능)

https://youtu.be/k0O2KEs4oIA?si=YUjqbKIva3OYJfv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