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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 음표가 너무 많다? - 모차르트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구출》 초연

by plutusmea 2025. 7. 8.

 

빈에서 울려 퍼진 모차르트의 ‘독일 오페라’ 선언

1782년 7월 16일, 오스트리아 빈의 부르크 극장(Burgtheater)에서는 역사적인 공연이 열렸다. 26세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가 작곡한 독일어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구출(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가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가 지배하던 유럽 음악계에서, 독일어로 된 오페라가 중심 무대에 오르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날 저녁, 빈 시민들은 웃음과 감동, 음악적 혁신이 가득한 작품을 마주하게 되었고, 모차르트는 ‘비엔나 시민의 작곡가’로서 첫 번째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

 

징슈필의 형식, 독일 오페라의 실험

《후궁으로부터의 구출》는 징슈필(Singspiel) 형식의 오페라로, 음악과 대사가 번갈아 등장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레치타티보(recitativo, 대사식 노래)와 아리아 중심 구성과는 다른 독일 특유의 오페라 형식이다. 오페라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생생한 감정과 드라마로 가득하다.

 

바실리오라는 귀족 청년이 연인 콘스탄체와 하녀 블론데, 그리고 하인의 구출을 위해 터키의 총독 셀림의 궁전으로 향한다는 이야기. 이국적인 설정 속에서 모차르트는 유쾌한 유머, 긴박한 위기, 그리고 용서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뛰어난 음악적 표현력으로 풀어낸다. 특히 작중 총독 셀림이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하는 마지막 장면은 당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바르바라 크라프트 작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초상화》
바르바라 크라프트(Barbara Krafft),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초상화》(1819)

 

징슈필(Singspiel), 독일어 오페라의 독자적 형식

《후궁으로부터의 구출》는 이탈리아 오페라와는 확연히 다른 형식인 징슈필로 작곡되었다. 징슈필은 ‘노래극’을 뜻하는 독일어로, 음악과 대화가 번갈아 등장하는 구조를 가진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이야기 전개를 위해 노래 형식의 대사인 레치타티보(recitativo)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징슈필은 배우들이 실제 대사처럼 말하는 방식의 연극적 요소를 중시한다.

이러한 구조는 작품의 전개 속도를 빠르게 하고, 관객에게 더 직접적으로 감정이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그만큼 유머와 감정 표현이 유연하고, 언어와 음악의 경계가 부드럽게 넘나들 수 있다. 특히 모차르트는 이 형식을 통해 각 인물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그려냈으며, 아리아와 대사의 전환을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징슈필은 단순히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중화 버전’이 아니라, 독일 오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초 무대였다. 이후 베버(Carl Maria von Weber), 바그너(Richard Wagner) 등으로 이어지는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출발점이기도 하며,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또한 징슈필 형식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터키풍’ 음악과 동양에 대한 환상

18세기 유럽에서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포와 호기심이 뒤섞인 문화적 분위기가 존재했다. ‘튀르키시 패션’은 음악, 의상, 무대 미술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모차르트 역시 이 흐름을 적극 활용했다. 《후궁으로부터의 구출》는 소위 ‘알라 투르카(alla turca)’ 양식을 도입해 타악기(심벌즈, 트라이앵글, 큰북 등)를 활용한 이국적인 사운드를 구현했다. 작품 서곡에서부터 관객은 낯선 세계로 끌려들어간다.

 

그러나 이 오페라가 단순한 이국적 판타지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서 보여주는 ‘타자에 대한 이해’의 태도 때문이다. 총독 셀림은 서구적 영웅이 아닌, 동양적 품격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모차르트는 동서양의 대립을 전쟁이 아닌 인간적인 교류와 용서로 풀어내는 서사를 제시하며 시대를 앞서간 통찰을 보여준다.

 

‘음표가 너무 많다’는 황제의 농담

《후궁으로부터의 구출》는 초연 당시 큰 인기를 얻었지만, 그 길지 않은 대사량에 비해 엄청난 수의 음표로 구성된 아리아들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모차르트 전기 작가들이 회고 속에 남긴 바에 따르면, 황제 요제프 2세는 초연을 본 후 “음표가 너무 많군요(zu viele Noten)”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에 모차르트는 “폐하, 꼭 필요한 만큼의 음표입니다(Majestät, es sind genau so viele Noten, wie nötig)”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대화는 단순한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예술성과 대중성의 경계, 작곡가의 자유와 후원자의 기대 사이에 놓인 긴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차르트는 황제에게 아첨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예술적 확신을 고수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후궁으로부터의 구출》는 대중을 즐겁게 하면서도 예술적 깊이를 유지하려는 그의 첫 번째 시험장이었던 셈이다.

 

모차르트에게 남은 과제 : 빈에서의 입지

이 작품의 성공은 모차르트가 빈에서 궁정 작곡가가 아닌 ‘자유 예술가’로 살아가려는 계획에 큰 발판이 되었다. 《후궁으로부터의 구출》는 귀족이 아닌 시민을 대상으로 한 흥행작이었고, 모차르트는 후원자 없이도 예술적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불안정한 생활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는 이듬해 콘스탄체와 결혼하고, 작품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지만,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줄 궁정 직책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모차르트가 작곡가로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 분기점이었다. 《후궁으로부터의 구출》 이후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술피리》와 같은 대작들이 잇따라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오늘날 다시 듣는 《후궁으로부터의 구출》

이 작품은 지금도 유럽과 세계의 오페라 극장에서 꾸준히 공연된다. 경쾌한 서곡과 익살스러운 장면, 감성적인 아리아들은 관객의 세대를 뛰어넘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콘스탄체의 아리아 〈Martern aller Arten〉은 극도로 난해한 기교를 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목소리뿐 아니라 오케스트라와의 호흡, 감정 표현 등에서 가수의 역량이 총체적으로 시험되는 곡이다.

 

동시에 《후궁으로부터의 구출》는 단지 즐거움을 주는 오페라를 넘어, 문화 간 대화, 인간의 감정과 선택, 그리고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깊은 질문을 품은 작품으로 다시 읽혀야 한다. 모차르트는 그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 작곡가’가 아니라, 음악을 통해 시대와 인간을 성찰한 사상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참고로 독일어 원제 《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는 직역하면 “후궁에서의 유괴” 또는 “후궁으로부터의 탈출”로 해석된다. 여기서 “Entführung”은 단순한 ‘도망’이 아니라, 누군가를 데리고 빠져나오는 행위를 뜻한다. 즉, 극 중 주인공 바실리오가 연인 콘스탄체와 하인들을 ‘구출’하는 상황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따라서 《후궁으로부터의 구출》, 《후궁으로부터의 탈출》,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으며, 의미상으로는 “구출극(Rescue Opera)”이라는 장르에 해당한다.

 

제33회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정기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 W.A.Mozart '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 (2023.11.3)

https://youtu.be/-yyc7QaRBec?si=Ss1_Ftn08R20UhJ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