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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 황금의 화가 - 구스타브 클림트의 사망

by plutusmea 2025. 7. 8.

 

황금으로 수놓은 삶의 미학

1918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황금의 화가’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럽을 뒤흔든 스페인 독감 팬데믹의 여파 속에 맞은 그의 죽음은 단지 한 예술가의 타계만이 아니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기 직전의 시대를 가장 화려하고 도발적인 색채로 그려낸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황금빛으로 수 놓인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클림트는 평생 제도화된 미술 교육과 고전주의적 권위에 저항했다. 그는 빈 미술 아카데미의 교육을 받았지만, 그가 추구한 예술은 더 이상 역사화나 초상화의 틀에 갇힐 수 없었다. 그는 삶과 죽음, 성과 억압, 아름다움과 퇴폐라는 경계를 넘나드는 시각 언어를 개발했고, 이로써 미술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심리적·상징적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키스》의 황금빛 입맞춤

그의 대표작 《키스》(Der Kuss, 1907–1908)는 단순한 연인의 포옹이 아니라, 우주적 결합을 암시하는 상징의 캔버스다. 두 인물은 장식적인 모자이크 문양과 금빛 물결 속에 잠겨 있다. 중세 비잔틴 성화에서 영감을 받은 금박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시도였지만, 클림트는 이를 통해 ‘신성함’과 ‘관능성’이라는 이질적인 감정을 통합했다.

 

클림트는 황금 박과 기하학적 패턴을 통해 평면성과 깊이감을 동시에 부여했으며, 이를 통해 감상자는 일상적 시선을 초월한 경험을 하게 된다. 《키스》는 이탈리아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에서 본 비잔틴 모자이크에서 받은 충격을 토대로 구상되었으며, 종교화의 장엄함을 감각적 사랑의 장면으로 전환했다.

 

《키스》(Der Kuss, 1907–1908)
《키스》(Der Kuss, 1907–1908)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서

클림트는 생애 내내 ‘죽음’과 ‘성(性)’, ‘여성’을 반복적으로 탐색했다. 이는 그가 남긴 수백 점의 드로잉과 회화에서 확인된다. 특히 《생명과 죽음》(Tod und Leben, 1910–1915)은 유명한 후기작 중 하나로, 생명의 윤무(輪舞) 속에 죽음의 그림자를 나란히 배치했다. 이는 에로스와 타나토스(Eros & Thanatos)라는 프로이트식 대비 구도와도 연결된다.

 

이 시기의 클림트는 더 이상 단순한 장식화를 넘어서 철학적 사유와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를 펼쳤다. 《생명과 죽음》은 기쁨, 성욕, 가족, 노화, 그리고 그 너머의 죽음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끌어안고 있으며, 이는 고전 종교화에서 유래한 ‘죽음의 춤(Danse Macabre)’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볼 수 있다.

 

여성의 얼굴로 쓴 미술사

클림트의 회화는 무엇보다 여성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당대의 어느 화가보다도 더 많은 여성 누드와 초상화를 남겼고, 그 여성들은 결코 대상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눈빛과 자세, 공간의 장식은 ‘여성 그 자체’를 신화적 주체로 승화시킨다.

 

대표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1907)은 오스트리아 유대인 사회의 상류층 여성 초상임과 동시에, 비잔틴 황후를 연상케 하는 신화적 포즈를 지닌 인물로 그려졌다. 이 작품은 2006년 뉴욕의 노이예 갤러리에 약 1억 3,500만 달러에 낙찰되며, 한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예술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는 현상 속에서도 클림트의 회화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계속 살아 숨 쉬고 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그리고 예술의 사망

클림트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이어 스페인 독감 감염으로 상태가 급격히 악화하여 사망에 이르렀다. 그 해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천재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도 같은 이유로 사망한 해였다. 두 사람은 단지 스승과 제자 이상의 관계였으며, 서로의 회화 언어에 영향을 주고받는 동반자였다. 1918년 한 해 동안 클림트, 실레,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 등 빈 분리파의 주요 예술가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나면서, ‘황금시대’의 종언이 선언되었다.

 

그의 작업실에 남겨졌던 미완성작들—그중에는 《브뤼셀의 아담과 이브》 같은 걸작의 단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은 제자나 동료들에 의해 보존되거나 소실되었다. 하지만 그의 미학은 단절되지 않았고, 이후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등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이어졌다.

 

지금, 다시 보는 황금의 의미

오늘날 클림트의 회화는 미술사 교과서 속 고전이라기보다,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시각언어로 받아들여진다.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그의 전시는 항상 매진에 가까우며, 유럽을 여행한 이들이 가장 기억하는 ‘미술관 속의 순간’으로 종종 꼽힌다.

 

클림트는 관능과 장식, 철학과 직관 사이의 긴장을 자신의 붓끝에 담아냈고, 이는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시각문화 속에서도 유효한 언어로 남아 있다. 그의 금박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감정과 신화, 시대와 인간성을 포괄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의 유산은 여전히 이어지며, 21세기의 새로운 미술 감상자에게도 신선한 감동을 준다.

 

구스타브 클림트와 아르놀트 쇤베르크

구스타브 클림트와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한 동시대의 예술가로, 각각 회화와 음악의 영역에서 전통을 해체하고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 혁신가였다. 클림트는 상징주의와 황금빛 장식성을 통해 인간 내면의 욕망과 죽음을 형상화했으며, 쇤베르크는 조성 음악의 규칙을 깨고 무조성과 12음 기법을 도입해 음악의 언어를 급진적으로 확장시켰다. 비록 이들이 직접 교류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들의 작품은 동일한 도시, 동일한 시기, 동일한 사유의 토대 위에서 자라났다.

당시 빈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오토 바그너의 건축 혁신,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의 표현주의 등 수많은 예술 사조가 교차하는 문화적 용광로였다. 클림트가 이끈 빈 분리파는 예술의 독립성과 미적 실험을 강조했으며, 쇤베르크 또한 청중의 기대를 거스르며 음악에서 감정과 무의식을 탐구했다. 이들은 장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공통된 미학적 전략을 공유했고, 빈 근대주의(Wiener Moderne)의 두 축을 형성했다.

클림트가 세상을 떠난 1918년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한 해였으며, 이 정치적·사회적 격변은 쇤베르크의 예술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클림트가 황금빛으로 시대의 몰락을 은유했다면, 쇤베르크는 음과 음 사이의 질서마저 해체하며 불안한 세계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두 예술가는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시대를 말하고 있었으며, ‘질서의 해체와 감각의 재건’이라는 그들의 과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