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1월 24일, 영국 록 밴드 퀸(Queen)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가 영국 런던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에이즈(AIDS) 합병증으로 인한 기관지 폐렴이었다. 그는 사망 하루 전 공식 성명을 통해 자신이 에이즈 투병 중임을 처음으로 공개했으며 이는 당시 감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고려할 때 대중 앞에 나선 드문 사례였다. 프레디 머큐리는 평생 무대에서 개성적이고 실험적인 표현을 지속한 예술가였고 그의 죽음은 음악계와 사회 전반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음악 활동은 거의 사망하기 전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The Show Must Go On》 녹음 시점에는 이미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된 상태였지만 그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Bohemian Rhapsody》, 《Somebody to Love》, 《We Are the Champions》 등 다양한 장르를 결합한 곡에서 드러나는 표현력은 공연예술의 기준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5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은 그의 무대 장악력이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난 사례이며 지금까지도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라이브 무대로 꼽힌다.
그의 장례식은 조로아스터교 의식에 따라 런던 웨스트 런던 크리메토리엄(West London Crematorium)에서 가족과 가까운 지인만 참석한 비공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생전 종교적 전통을 존중받기를 원했고 장례도 간소하게 치르기를 바랐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었으며 유골은 그가 생전 가장 신뢰한 인물이었던 매리 오스틴(Mary Austin)이 보관했다. 매리 오스틴은 프레디 머큐리의 1970년대 초기 연인이자 평생의 가족 같은 존재로 그는 생전에 “법적으로 인정된 관계는 아니지만 매리는 나의 아내나 다름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녀는 그의 뜻에 따라 유골을 보관하였는데 어디에 안치되었는지 구체적인 장소는 공개되지 않았다.
한국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이 일화와 관련해 매리 오스틴이 프레디 머큐리의 남성 연인을 질투했고, 그의 사후에 유골을 숨기는 방법(아무도 모르는 곳에 안치하는 방법)으로 일종의 복수를 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더 나아가 어느 공동묘지에서 프레디 머큐리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와 묘비가 발견되었다가 그것마저 사라지는 미스테리가 있었다는 식으로 방영했지만 모두 사실이 아니다. 매리 오스틴은 프레디 머큐리의 성적 정체성과 남성 파트너 존재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가족과 같은 관계에서 그의 사망 전까지 유언을 비롯한 법적 문제와 병간호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언론의 인터뷰에서도 매리는 "그가 원한 방식대로 했을 뿐이다. 아무도 그 위치를 알 필요가 없다."고 하여 유골 안치(또는 처리)는 순전히 프레디 머큐리 본인의 뜻(유언)에 따른 것이었음을 밝혔다.
사후 그를 기리는 활동은 다양한 형태로 이어졌다. 1992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The Freddie Mercury Tribute Concert’에는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참여했고 공연 수익은 에이즈 연구 기금 조성에 사용되었다. 이후 에이즈 예방과 치료를 위한 단체 ‘The Mercury Phoenix Trust’가 설립되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퀸의 음악은 세대를 넘어 다시 확산되었고 영화 《Bohemian Rhapsody》는 그의 삶을 새로운 관객에게 소개하며 문화적 영향력을 한층 강화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사망 이후에도 여전히 대중음악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