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10월 29일,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된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은 억압된 시대 속 예술의 언어로 태어난 걸작이다. 스탈린 치하의 침묵을 넘어 인간 내면의 고통과 해방을 음악으로 승화한 작품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억눌린 시대의 산물
1940년대 후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는 예술가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1948년 소비에트 공산당의 문화 통제 기관인 ‘자다노프 교시’가 발령되면서 그는 ‘형식주의자’로 비판받았고 작품 발표와 교육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 시기 그는 공식 무대에서는 침묵했으나 내면적으로는 거대한 폭풍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A단조 Op.77(99)》은 바로 그 억압의 시기에 완성된 작품이었다. 작곡은 1947년에서 1948년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정치적 검열과 비난 속에서 그는 곡을 서랍 속에 넣어둬야 했다. 이 협주곡은 침묵의 대가로 태어난 예술적 고백이었다.
마침내 봉인이 풀리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으로 분위기가 완화되자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예술가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얻었다. 그가 가장 먼저 세상에 내놓은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협주곡이었다.
1955년 10월 29일, 러시아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필하모니홀에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 1908-1974)의 독주, 예브게니 므라빈스키(Yevgeny Mravinsky) 지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초연되었다. 무려 작곡 후 7년 만의 일이었다.
초연이 끝난 뒤 청중은 오랜 침묵 후 폭발적인 박수로 응답했고, 오이스트라흐는 “이 곡은 인간의 영혼을 통과하는 심리적 서사”라고 평했다.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을 Op.99로 새로 발표했는데 이는 검열로 인해 공개가 지연된 작품임을 스스로 구분하려는 상징적 행위이기도 했다.

내면의 독백과 음악적 구조
이 협주곡은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다.
제1악장은 ‘녹턴(Nocturne)’으로 어두운 명상과 깊은 고독이 감돈다. 바이올린은 마치 말을 삼키듯 낮은 음역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절규로 번져나가며 피아니시모로 끝난다.
제2악장은 ‘스케르초(Scherzo)’로 폭발적 리듬과 긴박한 대위법이 이어진다. 이 부분은 쇼스타코비치가 사회적 긴장을 음악으로 번역한 단면처럼 들린다.
제3악장 ‘파사칼리아(Passacaglia)’는 이 작품의 정점으로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반복 베이스 위에 변주가 중첩된다. 이 장대한 변주는 마치 한 예술가가 체제의 억압 속에서도 예술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 투쟁의 독백처럼 들린다.
마지막 제4악장 ‘부를레스카(Burlesque)’에서는 아이러니한 희극성이 폭발한다. 거칠게 웃음 짓는 듯한 리듬 속에 긴장과 해방, 냉소와 생동감이 공존한다.
오이스트라흐와 예술적 동행
이 작품의 헌정 대상은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였다. 그는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적 동반자였다. 작곡가는 오이스트라흐의 연주 스타일과 음색을 염두에 두고 모든 세부를 설계했다. 초연 후 오이스트라흐는 협주곡 전반의 구조를 “네 개의 악장이 아니라, 네 가지 심리 상태로 구성된 인간의 내면극”이라 정의했다.
그는 이 작품을 녹음할 때조차 긴장감과 경외심을 잃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 곡을 연주할 때면 바이올린이 악기가 아니라 하나의 목소리가 된다.” 이 말은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을 통해 표현한 ‘말할 수 없는 것’을 대변한다.
정치적 침묵과 예술의 언어
쇼스타코비치는 직접적인 정치적 발언을 자제했지만 그의 음악은 시대를 향한 비유로 가득 차 있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은 개인적 체험을 넘어 전체주의 체제 속에서 예술이 견뎌야 하는 고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제3악장의 베이스 변주는 마치 지배와 복종의 순환을 암시하고 그 위에서 변주되는 바이올린 선율은 인간의 양심이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증언한다. 겉으로는 추상적이지만, 그 구조적 긴장감 속에는 억압받은 시대의 심리학이 녹아 있다. 그는 ‘형식주의’라는 비난 속에서도 자신만의 음악 언어를 통해 체제의 감시를 비켜가며 진실을 노래했다.
억눌린 시대를 넘어선 불멸의 음악
오늘날 이 협주곡은 쇼스타코비치의 대표작이자 20세기 바이올린 레퍼토리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음악은 단순한 정치적 시대극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진실에 대한 탐구였다.
불안과 희망, 두려움과 해방의 양극이 맞닿는 곳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인간이 결코 침묵만으로 살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은 음표마다 감춰진 시대의 비명이며, 동시에 예술이 체제를 초월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초연이 이루어진 1955년 10월 29일, 레닌그라드의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진 그 음색은 지금도 인간의 양심이 가진 힘을 증언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iuGTggSP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