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10월 28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 소설가 박경리의 생애와 대표작 《토지》를 중심으로 인간의 존엄과 시대의 윤리를 탐구한 문학 세계를 조명한다. 여성 작가의 독립성과 대하서사로 확장된 인간의 서정을 함께 다룬다.
삶이 곧 문학이 된 작가
박경리는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넓은 세계를 구축한 작가로 기억된다. 그는 가난과 비극의 시대를 통과한 세대의 목소리를 문학으로 증언했으며, 특히 장편소설 《토지》를 통해 개인의 운명과 민족의 역사를 한 몸처럼 엮어냈다.
박경리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스물네 살에 남편을 잃고 홀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가난과 고독을 문학의 원천으로 삼았다. 통영의 바다에서 태어나 진주, 부산, 서울로 이어진 그의 삶의 궤적은 해방과 전쟁, 분단, 산업화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궤적과 겹쳐 있었다.
그가 작품 속에서 그려낸 인물들은 시대의 고통을 몸으로 감내하며 버티는 존재들이다. 그것은 단순한 여성의 생존기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투쟁의 기록이었다.
《토지》, 한민족의 서사로 확장된 인간 이야기
박경리의 대표작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약 25년에 걸쳐 완성된 대하소설이다. 전 5부 21권, 6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한반도의 근대사를 관통하는 인간과 공동체의 초상이다. 배경은 경남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만주, 일본, 러시아로 확장된다. 한 마을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제국주의와 식민지, 전쟁과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운명을 통해 한민족의 근현대사를 재구성한다.
이 소설의 중심에는 최 참판댁의 딸 서희가 있다. 그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자신의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인물로, 박경리 자신을 투영한 듯한 존재다. 서희의 여정은 ‘땅’을 잃고 다시 찾으려는 인간의 투쟁이자, 내면의 자존을 지키려는 인간 정신의 서사로 읽힌다.
《토지》의 제목은 단순히 물리적 땅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 삶의 터전이며 잃어버린 정체성과 역사를 회복하려는 염원의 상징이다. 박경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근거가 땅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에게 땅은 인간의 도덕적 근거이자 공동체의 기억이 축적된 장소였다.

여성 작가의 목소리
박경리가 한국 문학사에서 갖는 또 하나의 의의는 여성 작가로서 독립적 문학 세계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그는 여성의 삶을 한낱 주변적 존재로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남성 중심 사회의 질서 속에서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여성들을 전면에 세웠다.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 등 초기 작품에서도 이미 여성의 생존 의지와 사회적 현실 인식이 짙게 배어 있다. 박경리의 여성 인물들은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다. 그들은 시대의 억압을 돌파하면서도 인간으로서 자존과 품위를 잃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훗날 여성문학의 흐름을 열어젖힌 선구적 시도로 평가된다.
그는 “문학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작업이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신념 속에는 여성의 존엄뿐 아니라 인간 전체의 구원이 놓여 있었다. 박경리의 여성은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고난을 통과하며 스스로 그 존재를 증명하는 인간이다.
시대의 윤리와 문학의 품격
박경리의 문학은 ‘인간의 존엄’이라는 윤리적 기둥 위에 서 있다. 그는 시대의 폭력에 맞서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과 품위를 문학 속에서 끊임없이 되묻는다.
《토지》의 인물들은 부패한 권력, 식민지의 수탈, 가족 간의 배신과 사랑의 모순 속에서 끝내 인간의 근본적 선의를 잃지 않는다. 박경리는 이를 통해 문학이 현실을 비판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정신의 작업’임을 증명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시대를 심판하지 않았고, 대신 인간의 내면에서 윤리의 불씨를 살려내려 했다. 그의 작품에는 도덕적 분노가 있지만, 그 분노는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향한 물음으로 전환된다. 그것이 박경리 문학의 깊이다.
박경리와 자연, 그리고 평사리
평사리의 들판은 그에게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문학의 영토였다. 그곳에서 그는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욕망, 사랑과 상처를 기록했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근원을 흙과 바람이 살아 있는 마을에서 다시 써 내려간 것이다.
박경리는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흙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이다”라고 했고, "흙은 인간의 품이며, 그 품 안에 모든 생명이 다시 싹튼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흙을 믿는다. 흙은 인간을 품고 다시 사람을 내보내는 어머니"라고 했다. 그의 문학이 토지로부터 출발해 인간으로 귀결되는 이유는 바로 이같은 신념 때문이다.
박경리 문학의 유산
《토지》는 연극, 드라마, 라디오, 만화 등 다양한 매체로 재창조되었고, 그의 문장은 한국어가 품을 수 있는 정서의 깊이를 새롭게 보여주었다.
박경리는 ‘대하소설의 작가’라는 평가를 넘어 한국 문학의 윤리적 토대를 세운 인물로 자리한다. 그의 문학은 단지 이야기의 규모나 분량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성찰의 깊이로 인해 여전히 현재형이다.
그가 남긴 문학의 힘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이자 오늘의 독자에게도 유효한 물음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로 완성된 문학
박경리는 예술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신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는 문학이 시대의 변화를 이끌지 못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토지》의 마지막 장에서 인물들이 겪은 상실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기운이 여전히 흐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인간을 절망 속에서도 끊임없이 재생되는 존재로 보았다.
박경리의 문학은 거대한 시대의 비극을 그리면서도 결코 비관으로 끝나지 않는다. 땅은 다시 싹을 틔우고, 사람은 다시 살아간다. 그것이 그의 문학이 전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