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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On This Day): 12월 12일

by plutusmea 2025. 12. 7.

627-12-12

  • 나인베아(Nineveh) 전투일이다. 비잔틴 제국의 헤라클리우스 1세(Heraclius I)는 이 전투에서 사산 왕조(Sasanian Empire) 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오랜 전쟁으로 소모된 동로마가 붕괴 직전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비잔틴·사산 전쟁의 주도권이 결정적으로 비잔틴 측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1531-12-12

  • 과달루페(Guadalupe)의 성모 발현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날이다. 이 사건은 16세기 초 멕시코 원주민 출신의 개종자였던 후안 디에고(Juan Diego)가 테페약(Tepeyac) 언덕에서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고 보고한 날짜로 알려져 있다. 테페약 언덕은 오늘날 멕시코시티(Mexico City) 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스페인 식민지 시기 이전부터 원주민 종교에서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과달루페’라는 명칭은 후안 디에고가 보았다고 한 성모가 스스로 밝힌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 멕시코 가톨릭 전통에서 성모 숭배의 상징적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공간적·문화적 배경 속에서 보고된 발현은 원주민 신앙과 가톨릭 신앙이 맞닿는 지점에서 독특한 의미를 갖게 되었고,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문화·종교적 기원이 되었다. 이 사건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공동체의 일체감과 민중 신앙의 상징으로 발전했고 오늘날까지도 지역 사회를 결속시키는 중요한 신앙 유산으로 남아 있다.

 

1787-12-12

  •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가 미국 헌법(United States Constitution)을 비준한 날이다. 펜실베이니아는 델라웨어(Delaware)에 이어 두 번째로 연방헌법 비준에 동의한 주로 당시 치열했던 연방주의자(Federalists)와 반연방주의자(Anti-Federalists) 간 논쟁 속에서 연방 체제 수립에 결정적인 지지를 보낸 지역이었다. 이 비준은 헌법 발효에 필요한 아홉 개 주의 동의를 확보하기 위한 흐름을 가속화했고, 이후 미국이 단일한 연방국가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1897-12-12

  • 벨기에 의회(Belgian Parliament)가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에서 벌어진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조사 절차를 개시한 날이다. 당시 콩고 자유국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Leopold II)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영토였으며, 고무와 상아 수탈을 위해 조직된 관리 체계 속에서 강제 노동과 폭력이 구조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국제 언론과 선교사 보고서에 의해 혹독한 학대가 폭로되자 유럽 전역에서 비판 여론이 확산되었고, 이에 벨기에 의회가 마침내 국왕의 식민 통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첫 공식 절차에 착수한 것이다. 이 조사는 이후 국제적 압력을 더욱 키우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1908년 벨기에가 콩고를 공식적으로 병합하면서 국왕 레오폴드 2세(Leopold II)의 개인 소유 식민지 체제는 종식되었다. 이와 함께 콩고는 벨기에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식민지, 즉 벨기에령 콩고(Belgian Congo)로 편입되었다.

1901-12-12

  •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가 대서양 횡단 무선 신호 수신에 성공한 날이다. 그는 캐나다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섬의 시그널 힐(Signal Hill)에서 영국 콘월(Cornwall)에서 송신된 모스 부호 ‘S’를 무선으로 받아냈다. 이 실험은 당시 전파(電波)가 곡률을 가진 지구를 따라 멀리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남아 있던 상황에서 장거리 무선통신이 실제로 가능함을 입증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마르코니의 성공은 이후 해상 통신·군사 통신·방송 기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며, 전 세계 통신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다만 당시 수신 장비의 한계로 인해 실제 신호가 명확히 포착되었는지에 관해서는 후대 학계에서 일부 논쟁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실험이 장거리 무선통신 가능성을 세계에 처음으로 제시한 사건이라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다.

 

1915-12-12

  • 원세개(Yuan Shikai)가 황제 즉위를 선포한 날이다. 당시 그는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군사력과 정치 기반을 바탕으로 제정 복고를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스스로 중화제국(Empire of China)의 황제에 오른다고 선언했다. 원세개의 즉위 시도는 국내 군벌 세력의 반발과 각 성(省)에서 벌어진 독립 선언으로 즉각적인 저항에 직면했으며, 국제 사회 역시 그가 공화제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지지하지 않았다. 이러한 압력 속에서 원세개는 결국 제정 복고를 철회했으나, 이번 선언은 그의 정치적 기반을 급격히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군벌 분열과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25-12-12

  • 레자 샤(Reza Shah)가 즉위하며 팔라비 왕조(Pahlavi dynasty)의 통치를 공식적으로 시작한 날이다. 그는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를 폐위하고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행정·군사·교육·인프라 개혁을 추진했다. 이후 왕위는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의 압력으로 레자 샤가 퇴위한 뒤 그의 아들 무함마드 레자 샤(Mohammad Reza Shah)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강압적 정치 운영, 경제적 불만, 서구화 정책에 대한 종교·사회적 반발이 누적되면서 왕정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었고, 결국 1979년 이란 혁명(Iranian Revolution)으로 팔라비 왕조는 붕괴했다. 이 혁명은 왕정을 폐지하고 이란을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으로 전환시키는 중대한 정치적 전환점이 되었다.

1941-12-12

  • 영국(United Kingdom)이 불가리아(Bulgaria)에 공식 선전포고한 날이다. 당시 불가리아는 독일과의 동맹을 통해 추축국(Axis Powers)에 가담하고 있었고, 독일의 발칸반도 전쟁 수행을 지원하며 전략적 거점을 제공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러한 불가리아의 협력 행위를 적대적 군사 행위로 간주해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이 조치는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II)의 전선을 동유럽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불가리아는 독일의 영향 아래 전쟁을 지속하다가 1944년 소련군의 진격과 국내 정권 교체를 거쳐 전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1945-12-12

  • 미군정(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이 남한 내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행정 질서 내에서 불법적 조직으로 규정한 날이다. 인민위원회는 해방 직후 행정 공백 속에서 지방 주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형성된 조직이었으나, ‘인민위원회(People’s Committees)’라는 명칭 자체는 사회주의 계열 정치운동의 영향을 받은 용어였고 이후 좌익 세력이 조직 운영과 정치적 방향성에서 주도권을 확대해 나갔다. 미군정은 이를 1945년 9월에 수립을 선언한 조선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orea) 계열의 정치적 성향을 지닌 조직으로 판단해 정식 행정 체계에 편입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군정법령에 따라 중앙집권적 행정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우선시했으며, 이에 따라 지방 행정권과 치안권은 군정 및 군정이 임명한 공식 기구가 행사하도록 조정되었다. 이 조치는 해방 직후 혼재하던 여러 정치 세력의 자치 구조를 정비하고 군정이 주도하는 단일 행정 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동시에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민위원회는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며 세력 구도가 재편되었고, 이는 이후 남한 정치 환경이 좌우 대립 구도로 뚜렷하게 정렬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원인과 결과는 지역별 상황과 정치 세력의 대응에 따라 상이했으며, 전체 과정은 해방 직후 급변하는 한반도의 복잡한 정치경제적 조건 속에서 전개된 것으로 평가된다.

1963-12-12

  • 1963년 12월 12일은 케냐(Kenya)가 영국(United Kingdom)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한 날이다. 이날 케냐는 식민지 보호령(British Kenya Protectorate) 지위를 벗어나 주권 국가로 승격되었고, 초대 총리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를 중심으로 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케냐의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아프리카 탈식민화 과정의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특히 1950년대 마우마우 항쟁(Mau Mau Uprising)을 비롯한 내부 저항 운동과 정치 협상은 영국 정부가 점진적 권한 이양을 선택하게 만든 배경이었다. 독립 이후 케냐는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 회원국으로 남으며, 1년 뒤인 1964년에는 공화국(Kenya Republic)으로 전환하여 조모 케냐타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이 날은 케냐 내에서 ‘잠후리 데이(Jamhuri Day)’로 불리며 독립과 공화국 선포를 동시에 기념하는 국가적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1969-12-12

  • 이탈리아 밀라노 피아차 폰타나 폭탄 테러. 밀라노 농업은행에서 폭탄이 터져 17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이후 극우·극좌 갈등이 격화되는 ‘긴장 전략’ 시대의 상징적 사건이다.

1979-12-12

  • 1979년 12월 12일은 이른바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날로,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수도경비사령관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 지휘 구조를 장악한 사건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사망한 뒤 정국은 과도 체제로 넘어가 있었고, 군 내부에서도 향후 권력 구조를 둘러싼 긴장이 높아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군부는 계엄사령부와 국군 지휘부의 통제 권한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육군 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의 명령 체계를 이탈한 독자적 행동을 감행했다. 반란군은 당시 보안사에서 김재규 사건 조사를 담당하고 있던 전두환의 지휘 아래,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했고, 이를 저지하려던 군 수뇌부 및 수도권 주요 부대의 작전권을 무력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나왔고, 결국 신군부는 주요 부대의 작전 통제권(OPCON)을 확보하며 군사력의 실질적 주도권을 차지했다. 12·12 사건은 법적으로는 군 지휘체계를 이탈한 불법적 무력동원으로 규정되며, 이후 사법 판단에서도 내란 목적의 군사반란으로 판결된 바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군부는 군 내부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이는 1980년 5월 비상계엄 확대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그리고 1980년 8월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으로 이어지는 정치 과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12·12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구조 변동을 촉발한 군사적·정치적 분기점으로 평가되며, 이후 한국 정치 질서와 민주화 과정에서 지속적인 논쟁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0-12-12

  • 2000년 12월 12일, 미국 연방대법원(U.S. Supreme Court)은 부시 대 고어(Bush v. Gore) 판결을 통해 플로리다(Florida)주의 대통령 선거 재검표 절차를 중단하도록 결정했다. 이 판결은 사실상 공화당 후보 조지 W. 부시(George W. Bush)의 승리를 확정짓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미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법 개입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사건은 2000년 미국 대선에서 플로리다주의 득표 차이가 극히 미세했던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투표지 판독 방식과 불완전한 투표지(hanging chads) 처리 기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유로 여러 카운티에서 손검표(manual recount)가 진행되었고, 고어(Al Gore) 후보 측은 재검표 확대를 요구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플로리다주 내 카운티별 서로 다른 재검표 기준이 헌법상 ‘법적 절차의 평등(Equal Protection Clause)’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재검표를 중단시켰다. 재검표 시한이 지나면서 플로리다주의 기존 인증 결과가 유효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조지 W. 부시가 선거인단에서 근소한 우위를 확보해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되었다. 이 판결은 대법원이 대통령 선거 과정에 직접 영향을 미친 드문 사례로 이후 미국 선거제도와 사법권의 역할을 둘러싼 광범위한 논쟁을 촉발했다.

2015-12-12

  • 2015년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UN기후변화협약(UNFCCC) 제21차 당사국총회(COP21)에서 전 세계 국가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기후체제인 파리협정(Paris Agreement)이 채택되었다. 이 협정은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2°C 이하로 제한하고, 가능하면 1.5°C 이하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목표를 명문화한 국제적 합의다. 파리협정은 기존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와 달리 모든 국가가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목표(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 NDCs)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구조적 차이를 가진다. 각 국가는 자국 상황에 맞는 목표를 제출하고 정기적으로 갱신해야 하며, 이행 수준을 국제적으로 검토받는 투명성 체계(Enhanced Transparency Framework)가 도입되었다. 또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먼저 겪는 개발도상국을 지원하기 위한 기후재원 조성(Climate Finance), 기후 적응(Adaptation), 손실과 피해(Loss and Damage) 등도 협정의 핵심 요소로 포함되었다. 파리협정은 2016년 11월 4일 발효되었고, 국제사회가 기후변화 대응을 장기적·구조적으로 추진하는 새 기준을 제공한 합의로 평가된다. 이후 각국의 정책, 산업 구조, 에너지 전환 전략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며, 글로벌 기후 거버넌스의 전환점을 이룬 사건으로 자리 잡았다.